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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독서

남산의 부장들 (현대사를 통한 우리의 자화상)

by 서쥬니's 대디 2020. 3. 25.

남산의 부장들
국내도서
저자 : 김충식
출판 : 폴리티쿠스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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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이란 영화가 최근에 개봉했다.

해당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보니 영화를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책을 찾아 읽게 된 것 같다.

 

책은 1961년 5.16 아침, 전두환 대위에서부터 시작해, 1979년 10.26 사태를 수습하는 전두환으로 끝을 마무리짓는다. 약 20여 년간 일어났던 박정희 정권 시대의 자화상을 그렇게 작가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반세기를 흘쩍 넘긴 1961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18년간의 통치, 

하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이 떠난 오늘날에도 그의 그림자는 남아있고, 그걸 이용하려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살면서, 과거를 통해 현재 우리가 직접 봐야 하는 것 무엇인지?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 책이었다.

 

역사를 통해 지금 현재의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는 말은,

앞으로 나와 나의 자녀가 살아갈 세상에서도 통하는 명제일 것을 의심치 않기에, 우리의 어두운 현대사를 돌아보길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난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 이전에, 김형욱 정보부장이 작성했던 '혁명과 우상'도 같이 읽어보았다.

 

사실 80년대 태어난 나와 비슷한 세대의 경우, 풍족한 조건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과거 유신체제에서 흔하게 일어났던 남산에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것을 몸소 겪어보지 않았기에,

 

난 김형욱 회고록을 읽으면서 그가 정권과 그 사회 시대를 그 자신은 대부분 죄가 없다는 식으로 기술한 부분에 대해 별 의심 없이 읽어 내려갔었다. 하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리우고 싶지 않은 본인의 책이었기에, '남산의 부장들'을 읽으면서 그가 왜 그렇게 정권 말기에 미국 청문회와 이런 회고록을 통해 살려고 아등바등했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 울분을 쌓고 살고 있으리라)

 

박정희와 박근혜, 그리고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과거 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남산의 부장들'을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그 시대 10대 사건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 책의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 남산(중앙정보부) 창설, 공화당 사전 조직

 

남산이란 용어는 중앙정보부의 별칭으로 남산 중턱의 1호 터널 북측 입구에 정보부 본부가 존재한 데서 비롯한다. 1960년대와 70, 80년대에는 "남산에서 데려갔다"라고 하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는 의미였다. (중략) '남산'은 5공 때 국가안전기획부로, 김대중 정부 때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1994년 서울 구룡산 남쪽의 내곡동으로 이전했다.

<공화당 사전 조직>은 군사쿠데타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의 합법적 집권을 위해 다른 야당의 발목을 법으로 묶어 놓고, 공화당을 미리 조직한 사건, 김종필 정보부장을 비롯한 주체 세력들은 1962년 정당을 비밀리에 사전 조직하고, 이 과정에서 4대 의혹 사건으로 불리는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크게 정치문제가 되었다.

 

-> 이미 과거부터 정치와 돈을 뗄래야 뗄수 없는 것이었던 듯하다. 최근의 이명박 대통령의 'BBK',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 전두환 대통령 재산 50만 원 등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인지? 모를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봐야 할 본질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2. 6.8 부정선거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박정희 시대 최악의 부정 관련 선거로 꼽히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박정희의 장기집권 기반(3선 개헌을 위한 2/3 의석 확보)을 닦기 위해 중앙정보부, 경찰, 여당이 앞장서서 매수, 협박, 회유, 공개투표 등의 방법을 총동원했다. (중략) 야당은 선거 직후 선거과정에서 저질러진 노골적인 부정 관권 금권선거의 증거를 들이대며 '전면 무효화',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였고, 의원등록을 거부하였다. (중략) 물의가 커지자 집권세력은 "타락되고 혼탁한 분위기의 선거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라며 스스로 부정선거임을 시인

 

3. 동백림 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 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중략)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과 동조 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다"라고 발표

 

-> 분단의 현실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 없다. 정권의 안정과 연장을 위해 그들은 죄가 없는 사람들을 반공이라는 죄명으로 잡아들이고, 그걸로 여론을 호도했다. 근래의 색깔론, 중국, 북한을 떠들고 있는 현재의 언론과 정치인들의 모습은 그런 부분에서 과거를 답습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4. 3선 개헌

 

대통령의 임기가 '4년 중임'(최장 8년)만 하도록 되어 있던 헌법을 3번까지 가능하도록 고친 헌법 개정, 1969년 대통령 박정희의 3선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추진했던 제6차 개헌을 말함. (중략) 이 개헌을 발판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세 번째로 출마하여 김대중 후보와 겨뤄 당선되었다. 1972년 이 헌법조차 없애 버리고, 유신헌법을 만들어 이후 10년간 집권 기간을 확보했으나, 그로부터 7년 후인 1979년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5. 4인 체제(10.2 항명 파동)

 

1970년을 전후해 여당인 공화당을 좌지우지하던 실력자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 등 4인을 지칭, 박정희가 집권세력 안에서 김종필 견제용으로 힘을 실어주어 생긴 이른바 4인 체제 인사들은 1975년에 박정희 3선 임기가 끝난 이후에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통한 신체제 등,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구상하였으나, 박정희의 특명으로 김성곤 등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정계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 자신이 맘에 안 들면 끌고 와서 고문하고 구타한다는 이 시대의 야만성, 그것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갖게 된 그 시대의 폭력성과도 연결된다 생각 든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렇게 보낸 60~80년대를 정확히 알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것이다.

 

6. 유신헌법(10.17 조치)

 

한국 헌정사상 7번째로 개정된 이른바 '제4공화국의 헌법'의 통칭으로 1972년 10월 17일 확정되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10월 유신'으로 불리기도 함. (중략) 유신헌법은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전면 부정하고 대통령에게만 권력을 집중하는 한편 반정부 세력의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특징임. 

 

-> 법을 통해 어떻게 그들의 폭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 법치주의를 표방한 독재의 전형이었다.

 

7. 민청학련 사건

 

1974년 4월 유신반대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 체포 사건으로 보통 민청학련 사건으로 불림. 체포된 사람들은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고, 75년 4월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내려진 20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중략) 2005년 12월 7일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민청학련 사건은... 대한민국 최대의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자유스럽게 표출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얼마 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8. 인혁당 사건

 

1974년 유신체제에 반기를 든 반정부 대학생 그룹인 민청학련의 배후로 몰려 극심한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한 도예종, 여정남, 서도원,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김용원 등 8인의 비극을 말함

 

9.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하인 박선호, 박홍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 

 

-> 박근혜 대통령 집권 시절이었다면, 이 주제를 가지고 영화화할 수 있었을까?

 

10.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0.26 사태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염사령관인 정승화에 맞서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 등을 놓고 대립각을 세웠다. 전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주도권을 장학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공격하고, 10.26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 (중략) 1993년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12.12 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 12.12사태에 가담한 대부분의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들은 5.18 특별법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 과거 시대로 비교하자면 칼을 찬 장군이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왕좌를 차지한 것과 뭐가 다를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희생당하신 분들에게 그들은 사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